설날 슬픈 수난사?…설날 유래와 풍습은?

“왜 설이죠? 설날에 관해 궁금해요.“
“글쎄, 다른 이름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설이라고 했을까?”
“설날을 맞으면서 설에 관해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맞아, 그런데 설날에 관해 알아볼 기회가 많지 않네.”
“설날에 관해 많이많이 알려주세요.”

설날은 추석과 더불어 우리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명절은 국가적으로 온 국민이 즐기는 절기입니다. 큰 명절 설날은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과 친척이 오순도순 모여 덕담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그동안의 안부를 전하고 정을 나누는 흥겨운 날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들뜬 기분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왕이면 설날의 유래와 설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맞으면 더욱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설날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묶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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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은 언제부터 명절이 되었을까?
오늘날 큰 명절로 지내는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에게 명절이 되었는지 이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의 설날과 관련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7세기 중국 역사서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설날의 유래를 이야기하면서 음력이라 부르는 태음태양력의 첫 날이 한 해 농사 준비의 시작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때 농업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에 역법이 도입된 이후부터 설이 우리 조상들의 명절이 되었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설날의 설이름 어떻게 유래 되었을까
설날의 설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대체로 세가지 설(說)이 있습니다. 먼저 새로운 날이 낯설다는 의미에서 낯설다의 어근인 ‘설다’에서 왔다는 주장입니다. 또 다른 유래설은 새롭게 시작되는 날을 의미 하는 ‘선날’이 설날로 바뀌었다는 설입니다. 또 다른 유래설은 자중하고 근신한다는 의미의 옛말인 ‘섦다’에서 왔다고 보는 주장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 세 가지의 모든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낮선 날이, 새롭게 개시되니, 자중하고 근신하는 날을 지내자는 뜻이 설날이라는 것입니다.

설과 관련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백제에서는 261년 설맞이 행사를 했으며, 신라에서는 651년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조원전에 나와 백관들의 새해 축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세시풍속은 농경의례
설날은 세시풍속의 하나입니다. 세시풍속은 역법에 따라 해마다 반복되는 풍습을 말합니다. 세시풍속은 말하자면 농경의례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세시풍속은 삼국시대에 그 유래가 특히 많습니다. 세시풍속은 삼국을 거쳐 고려 때 확립된 것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세시풍속은 특히 음력 1월인 정월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시풍속은 금기를 말하는 것이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가령 전라도 지역에서는 정월에 홍역 같은 전염병이 돌아 사람이 죽더라도 시신을 땅에 묻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지신이 놀라 동티가 나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창호지 등 문틀에 종이를 바르면 복이나 재물이 들어오지 않아 엄동설한에도 구멍이 뚫린 채 놔둬야 한다고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설날을 시작으로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동안의 정초 십이지일(十二支日)은 금기시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십이지신일 뭘 금기시 했을까
새해 처음으로 맞는 쥐날을 ‘상자일’ 이라고 합니다. 이날 옷을 지어 입으면 쥐가 쏜다고 해서 아낙네들이 길쌈이나 바느질을 꺼렸다고 합니니다. 새해들어 첫 소날인 ‘상축일’에는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좋은 여물을 많이 줘야 했다고 합니다. 첫 뱀날인 ‘상사일’은 불길한 날로 알려져서 이날은 장을 담그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들에 대한 금기도 있었는데 이는 행동을 규제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여성들이 집밖으로 나가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새해 첫 호랑이날에는 서로 왕래를 삼가며 특히 여자는 외출을 삼갔다고 합니다. 새해 첫 토끼날에는 남자가 먼저 일어나서 대문을 열어야 했다고 합니다. 양반가의 여인들은 남의 집에 인사를 갈 수 없어 몸종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반면 남성은 ‘상가에 다녀오거나 개고기를 먹은 남자는 부정이 들어 남의 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한다’와 같이 구체적인 행위에 한정해 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월에 행해지는 수많은 금기가 한 해의 시작을 순조롭게 하는 데 있었다고 합니다. 농한기를 보내는 동안 가족과 사회의 불길하고 위험한 일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설날 어떤 풍속이 있을까
설날은 한 해가 시작되는 새해 새 달의 첫 날입니다. 한 해의 첫 명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설날은 ‘낯설다’라는 말에서 유래됐다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설날을 정월대보름과 연관시켜서 해석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그중 설날의 대표적인 풍속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세배로 원래는 차례가 끝난 뒤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때 설맞이 행사를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설날은 한식과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새해를 맞기 전날에는 묵은세배를 하기도 하고 밤부터 새벽 사이에 파는 ‘복조리’를 사서 걸어두기도 했습니다. 남들보다 조리를 먼저 사야 복이 많다고 해 밤에 자다 말고 조리를 사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지만, 그 해의 행복을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뜻으로 조리를 마련했는데, 조리 안에 돈, 엿, 성냥을 등을 넣어 방 귀퉁이나 부엌에 매달아 두었다가 썼다고 합니다.

또 그믐날 밤에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여 집 안 구석구석에 등불을 밝히고 밤을 새웠는데, 이를 수세(守歲)라고 합니다. 설날 아침이 되면 설빔을 차려입고 차례를 지냅니다. 설 차례에는 떡국을 올리고 차례를 지낸 다음에 음복을 하고 떡국을 먹습니다. 차례와 성묘가 끝나면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이때 서로 복을 나눠주는 덕담(德談)을 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세뱃돈을 줍니다.

설날 놀이 어떤 게 있을까
설날에는 다양한 풍습들이 있었는데 차례, 세배, 떡국, 설빔(새옷), 덕담, 문안비, 설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청참, 윷놀이, 널뛰기 등이 있습니다. 설날 대표 놀이는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이 있습니다.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 전후로 성묘를 하는 세시풍속은 오늘날에도 잘 전승되고 있지만, 민속놀이 등 몇 가지 세시풍속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설날 수난사
농경사회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정월 풍속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조상 대대로 이어진 전통의 음력 설날을 고수하려는 사람들과, 생산 시스템의 변혁을 바라며 위정자들이 안착시키려 했던 양력 설날과의 100년 넘는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설날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1896년 1월1일입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이날부터 태양력을 공식적인 역법으로 도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태양력을 도입했다고 해서 음력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엔 왕실조차도 음력설에 각종 행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양력 1월1일을 휴일로 지정했을 뿐 별다른 행사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니다.

설(음력 설)의 진짜 위기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친일 내각이 구성된 순종시절부터 시작됐습니다. 1907년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친일파 이완용이 “국가는 이미 태양력을 준수해 쓰고 있는데, 음력 원단(새해 아침)과 동지에 의식은 이제부터 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순종은 이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일제는 설날을 탄압하기 위해 신정 때 학교에 10일가량의 방학을 주고, 관공서와 기업은 그날을 공식 휴일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반면 구정(음력 설)에는 일부러 조업을 강요하고 학생들이 학교를 빠지지 못하게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민족의 풍습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30년대 이후 우리날 설날(구정) 문화를 없애기 위해 더욱 강력한 조치에 나섰습니다. 방앗간의 조업을 금지해 상차림에 필요한 떡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설빔을 해 입은 아이들에게 먹물을 뿌린 기록도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설날에 대한 탄압은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4일 공휴일을 지정하면서 음력설을 빠뜨립니다. 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 국경일과 식목일·한글날·추석, 크리스마스까지 공휴일로 지정됐음에도 음력설만은 외면받은 셈입니다. 대신 신정은 1월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연휴로 정했습니다.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민족의 수치’라고 표현할 정도로 음력설을 없애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박정희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962년 경찰은 설을 앞두고 극장 광고물에 ‘구정 프로’라는 문구를 넣을 수 없도록 했고, 구정 때 임시열차의 증편 운행도 중지했다고 합니다 설을 앞둔 떡방앗간 조업 단속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 같은 기조는 전두환 신군부 초기까지 이어졌습니다.

군사독재 겪고 나서야 부활한 설
전두환 신군부는 매년 국무회의에서 ‘음력설 공휴일 지정 여부’를 놓고 논의했지만 번번이 합의에 실패했습니다. 1984년 12월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정의당이 구정 하루 동안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국민적 여망을 수용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발표했고 결국 1월21일 대통령령이 개정돼 처음으로 음력설은 공휴일이 됐다습니. 다만 명칭은 ‘민속의 날’이었습니다.

‘민속의 날’이란 불분명한 이름으로 이어지던 음력설이 본래의 이름을 찾은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신군부가 무너진 뒤 1989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1989년 2월 정부는 ‘민속의 날’의 명칭을 ‘설’로 바꾸고, 음력설과 추석을 3일 연휴로 하는 방향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정부가 ‘음력설’을 인정한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배의 수난과 군사독재 정권을 지난 후에야 우리 민족은 전통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