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명암? 라면역사 맛있어?…라면요리 레시피 꿀팁

라면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릿고개’로 불리는 배고픈 시절 국민간식이 되어준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그랬던 라면이 오늘날에는 출출할 때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간식이자 새참으로 진화했습니다. 오늘날 라면은 어디서든 만날 수 있습니다. 분식점에서 출출할 때 먹는 맛은 가히 일품입니다.

남자들은 라면에 대한 추억이라면 군대시절을 한번쯤 떠올리곤 합니다. 춥고 배고팠던 군대시절 빼치까에 선임이나 소대장 몰래 끓여먹든 라면맛은 그 어떤 맛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라면은 국민들의 추억을 먹고 자라난 우리의 먹을거리이자 포근한 옛 정을 퍼올리는 두레박 같은 존재입니다. 국민간식 라면은 언제 어떻게 태어나 또 어떻게 자라났을까요.

라면종류-라면역사-라면 맛있게 끓이는법

라면의 역사는 한국사회 성장과 함께 해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는 한국 사회의 성장과 그 궤를 함께 해왔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깜짝 등장한 라면은 한때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든든한 식량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랬던 라면이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는 식품으로, 간단한 요기를 위한 간편식으로, 때로는 술을 과하게 먹은 다음날의 해장용으로까지 사람들의 사랑받고 있습니다. 빨간 국물에 꼬들꼬들한 면은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1963년 9월15일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라면이 출시된 날입니다. 구불구불 과자같이 뭉쳐있는 튀긴 면과 국물용으로 별도로 포장된 스프는 당시로선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 딱딱한 면이 끓는 물에 다시 쫄깃한 식감의 면으로 변화하는 것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신기함 그 자체였습니다.

한국인 라면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으로 인식?
한국갤럽이 2013년 11월 조사한 결과가 재밌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라면이 ‘몸에 좋지 않은 음식’으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꾸준히 찾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조사를 보면 ‘라면이 몸에 좋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이 20대의 경우 88%인 반면, 60세 이상은 62%에 머물렀습니다. 30대와 40대, 50대는 각각 77%, 76%, 70%로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라면이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60세 이상이 15%인 반면 20대는 7%에 그쳤습니다. 30대와 40대, 50대는 각각 14%, 14%, 15%로 나타났습니다.

이 조사를 보면 젊은층이 장년층보다 라면에 대해 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재밌는것은 이렇게 라면이 부정적인 음식으로 대접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나라 국민들이 즐겨찾는 국민간식이라는 점입니다.

세계인 입맛 홀린 라면은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라면의 원조는 중국의 납면(拉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전시 비상식량으로 쓰던 것을 일본이 배워와 라멘으로 뿌리내리기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누구나가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9월 25일 일본 ‘닛신(日淸)식품’을 설립한 안도 모모호쿠에 의해서 처음 개발됐습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이 건면을 튀겨서 휴대하고 다닌 것에 착안해, 면을 기름에 튀겨 건조하고 닭뼈 육수맛을 낸 ‘치킨라멘’을 최초로 선보였습니다.

당시 치킨라멘은 현재처럼 수프가 따로 있지 않고 면 자체에 양념이 반죽돼 있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 일본 라면업계의 2위를 달리고 있던 묘조식품(명성식품)이 양념을 건조․분말화해 지금과 같은 별도 포장한 수프 형태의 라면을 생산했습니다. 안도는 1971년에는 미국 바이어가 종이컵에 라면을 부숴 포크로 먹는 것을 보고 ‘컵라면’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라면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안도 모모호쿠는 2007년 1월 5일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이 개발한 라면을 먹었다고 합니다.

라면의 시작?…라면 개발 아내의 튀김요리에서 착안
중국의 ‘납면(拉麵·라미엔)’에서 시작된 라면의 역사는 일본으로 건너와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요즘 같은 라면은 일본 닛신식품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회장에게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밀가루 원조를 받던 시절고 그는 일본에서 보다 싸고 맛있고 오래가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하고 고민하다가 아내의 튀김요리에서 착안하여 1958년 ‘순간유열건조법’을 발명하게 된 것이 라면의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라면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삼양식품의 창업주 고 전중윤 회장이었습니다. 전중윤 회장은 일본출장 중에 라면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국민소득이 100달러에도 채 미치지 못했던 1963년 당시는 외화가 부족한 빈국이었기에 달러를 빌려 달라고 정부를 설득해 라면을 만들시 시작한 것입니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1960년대 라면 1봉에 10원에 출시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0년대 초 당시 서울 남대문시장은 이른바 ‘꿀꿀이죽’이 한 그릇에 5원하는 양푼이 밥이 큰 인기를 끌 정도로 먹거리가 부족했습니다. 그 시절 국내 첫 라면 삼양라면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정부가 추진한 혼분식 장려정책으로 라면은 점차 식탁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식량이 부족하여 부자들은 쌀밥이나 우동을 먹었지만, 일반 국민들은 수재비나 칼국수 등으로 연명하고 현장노동자들이나 실업자들은 5원짜리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라면 1봉지 100g에 10원이 출시되었으니 당시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가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라면은 시판초기 국민들은 평소 먹던 맛과 다른 국물과 생소한 조리방식 등에 별로 익숙하지 못하다가 1960년 후반부터 서민 음식의 대명사가 되면서 비로소 ‘보릿고개’를 넘는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개발된 라면 5년이 지난후 한국 상륙
1963년 9월15일 삼양식품은 우리나라에 처음 라면을 출시합니다. 삼양식품은 일본의 라면 기술을 도입해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을 만들었습니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삼양식품은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기계 2대를 사들여 한국식 라면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본에서 세계 최초로 라면이 개발된 1958년보다 약 5년 뒤였습니다.

이 제품은 빨간색 봉지에 100g의 면과 닭고기 스프가 들어있었습니다. 가격은 약 10원이었습니. 당시 학교 교사 월급이 약 1만3000원 수준이었고, 미싱 봉제사의 월급이 3000원인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이었습니다.

무명기업 삼양식품 일약 국민기업으로 성장
196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설탕과 밀가루에 의존한 제품생산이 전부였기에 라면은 원시적인 식품문화에서 벗어나는 계기였습니다. 특히 다양한 첨가물과 식용유로 튀겨진 면발이 노란 색깔로 눈길을 끌었고 독특한 맛의 핵심인 스프는 양파와 마늘, 각종 야채와 고기 등으로 채워져서 60㎝ 전후 길이와 80가닥 전후의 면발이 조그만 노란 봉지에 포장되어 학생과 직장인, 노동자, 군인들을 중심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삼양식품은 무명기업에서 일약 국민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특히, 삼양라면은 우리나라의 어려웠던 현실을 반영한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식량난이 심각해지자 쌀을 대신해 간단하고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익숙지 않았던 라면, 판촉과 시식행사로 각광
1963년 9월15일 삼양식품이 이땅에 라면을 출시하면서 우리나라에 라면의 역사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라면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조리를 해서 밥을 먹는 게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미 조리된 음식을 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3년간 삼양에선 각종 판촉행사와 시식행사를 진행하는 등 각고으 노력 끝에 서민들에게 익숙한 음식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농심(당시 롯데공업)도 라면사업에 뛰어들면서 라면은 점차 서민 음식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삼양라면 배고픔 달래는 간식에서 국민라면으로
삼양라면은 ‘소품종대량생산시대’에서 소비자•소매점에서는 꼭 필요한 상품이었습니다. 1977년에는 삼양라면의 시장점유율이 90% 이상을 차지하면서 라면시장은 남녀노소들이 누구나 즐기는 인기식품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나라는 라면의 1인당 소비량도 세계 1위 자리를 유지하면서 우동 짜장 짬뽕 비빔 스파게티 등 다양한 맛의 상품으로 1위에 등극한 농심을 중심으로 오뚜기, 삼양식품, 팔도, 풀무원이 경쟁을 벌이면서 2조원 이상의 시장으로 성장했습니다.

한국인의 소울 푸드 라면… 변화무쌍한 50년 라면史
우리나라 라면 시장의 역사는 삼양식품과 농심이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생산시설이나 노하우가 없었던 고(故)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일본의 묘조식품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1963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삼양라면을 선보이게 됩니다. 농심은 전신인 롯데공업주식회사가 1965년 롯데라면을 출시하면서 라면시장에 진출, 삼양과 본격적으로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삼양라면은 라면 시장을 선점하면서 국민 라면으로 자리를 잡았고 식사 대용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경쟁업체들도 라면시장에 뛰어들게 됩니다. 롯데공업은 1965년 롯데라면을 출시한 데 이어 1975년 농심라면을 선보이게 됩니다. 당시 코미디언 구봉서와 곽규석이 등장해 “형님 먼저 드시오” “아우 먼저 들게나” 하며 서로 라면을 양보하다가 막판에 본심을 내보이는 TV CF의 인기만큼 농심라면은 큰 히트를 쳤습니다. 이를 계기로 롯데공업은 회사 이름까지도 아예 농심으로 바꿨습니다.

1960년대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으로 라면 각광
우리나라 라면 역사에서 혼분식 장려 정책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1960년대 정부는 식량난으로 혼분식 장려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이런 정부의 정책으로 라면시장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삼양라면과 롯데라면에 이어 ‘풍년라면’(풍년식품), ‘닭표라면’(신한제분), ‘해표라면’(동방유량), ‘아리랑라면’(풍국제면), ‘해피라면’, ‘스타라면’ 등 8개 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삼양식품이 8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었고, 나머지 업체가 도토리키재기식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구도가 한동안 지속되다가 1969년 삼양과 농심만이 살아남아 두 기업이 경쟁을 벌이는 구도로 정착되게 됩니다.

1980년대 농심 신제품으로, 삼양의 아성을 넘다
1970년대가 라면의 도약기였다면 1980년대는 한국 라면산업의 최고 전성기이자 격변기였습니다. 한국야쿠르트, 빙그레, 오뚜기 등이 라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들어 농심이 라면의 질적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1982년 경기도 안성에 스프 전문생산 시설인 안성공장을 설립하고, 너구리, 육개장사발면, 안성탕면, 짜파게티, 신라면 등 잇달아 히트작을 선보이면서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지각변동이 일아나게 됩니다. 농심 외에도 팔도(당시 한국야쿠르트)가 팔도비빔면과 도시락, 오뚜기가 진라면 등을 출시하는 등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들이 여럿 출시됐습니다. 1985년 3월 농심은 인기 절정의 너구리, 육개장사발면, 안성탕면, 짜파게티를 앞세워 라면시장에서 부동의 1위 삼양식품을 따돌리고 처음으로 1위의 자리에 올라서게 됩니다.

잘나가던 삼양라면 우지파동으로 최대 위기 봉착
1989년에는 삼양라면이 ‘공업용 우지(牛脂·쇠고기 기름)’ 파동으로 한바탕 시끄러웠다가 이후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큰 피해를 보는 등 최대의 위기를 맞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라면시장의 점유율을 80%까지 차지하며 잘나가던 삼양라면은 1989년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당시 비식용 소기름으로 라면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보도되면서입니다. 이른바 ‘우지 파동’이 터진 것입니다. 이 우지파동은 1997년 대법원에서 사실 무근이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삼양라면의 시장점유율을 10%대까지 떨어지는 등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1990년대 우리나라 라면이 수출로 전성기
1990년에는 다양한 라면이 쏟아졌습니다. 라면업계는 ‘왕뚜껑’, ‘튀김우동’, ‘오징어짬뽕’, ‘생생우동’, ‘수타면’, ‘신라면큰사발’ 등 다양하 맛을 가진 제품과 용기면을 출시하며 시장을 공략했다. 또한 냉장면, 냉동면, 생면 등 비유탕면 신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8년에는 라면 매출 규모가 사상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습니다.

1990년에는 컵라면 전성시대가 펼쳐지면서 해외수출이 본격화 됐습니다. 농심은 1990년대에 중국 상하이와 칭다오에,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 선양과 미국 LA에 식품제조 시설을 설립, 해당 국가는 물론 인근 지역에 대한 수출을 더욱 확대하게 됩니다.

삼양식품과 팔도도 해외 진출에 나서게 됩니다. 특히 팔도가 1986년에 출시한 ‘도시락’은 부산항을 드나들던 보따리 상인들을 통해 러시아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997년 팔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사업소를 개설한 이후 러시아 매출이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2000년대 한류 열풍과 모디슈머 전성기
2000년대로 진입하면서 라면은 새로운 형태로 사랑받게 됩니다. 그 트렌드는  ‘소량, 간식 화’로 대별되는  ‘소형 컵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게 컵라면으로 적당한 양과 다양한 메뉴로 청소년, 학생, 직장인 등 구분 없이 큰 인기를 끌었으며, 식사 대용이 아닌 간식 트렌드로 자리잡았습니다.

2000년대는 또한 라면의 한류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또한 모디슈머 열풍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농심은 싸이를 모델로 내새워 국내와 해외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신라면 블랙’을 한류 제품으로 키웠습니다. 국내에서는 모디슈머 열풍으로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젊은 신세대들이 새로운 맛을 찾아 라면과 라면, 혹은 라면과 기타 식품 간의 새로운 조합을 시도, 자기 입맛에 맞는 레시피로 승화시킨 모디슈머 열풍은 창조경제의 사례로까지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국민식품으로 각광받는 라면, 세계 최대 소비국
라면은 배고픈 시절 우리의 배고픔을 달래준 먹을거리였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그 맛은 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국민음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해마다 신제품이 거푸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의 입맛의 변화에 따라 라면의 종류도 수백가지가 넘습니다. 2014년 세계 라면협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 1명당 1년에 먹는 라면 개수가 74개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라면은 세계에서도 그 맛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라면의 경우 세계 100여국에 수출되고 있습니다.

별식이나 간식의 대명사로 사랑을 받고 있는 라면은 2000년대 들어 한류를 주도하는 한류식품(K-Food)으로 성장,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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